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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성공적인 삶을 사는 싱글맘의 자녀들
.

[현장르포] 제3땅굴, 판문점에 가다

도라산역에서의 단체촬영


지난 5월 어느 날 한 장의 팩스가 연구실로 날아들었다.
“통일부 초청 판문점 견학안내”란 제목의 한국잡지협회 공문이었다.
한국한부모가정연구소와 잡지협회가 어떤 관련성이 있나 싶겠지만
한부모가정연구소는 잡지협회의 회원사이기도 하다.

 
한부모가정 전문지 발행

한국한부모가정연구소는 한부모가정 지원사업의 하나로 싱글맘 &
싱글대디 전문잡지인 월간 <아름다운 가정>을 발행하고 있다.
1,500천가구(400만 명)에 이르는 한부모가정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정문화를 확대하기 위해 시작된 이 일이 벌써 1년이 넘어 통권
14호를 넘겼다.

 
두려움과 호기심 사이

통일부 남북회담 사무국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판문점 견학은
남북출입사무소 및 도라산역 방문 그리고 제3땅굴과 판문점
견학 코스로 잡혀있었다.

이 한 장의 공문을 받는 순간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제3땅굴이었다. 땅굴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1974년으로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그 당시 땅굴은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매스컴의
톱뉴스였다. 그 후 1970년대 후반 땅굴이 일반인에게 공개되면서
내 아버님이 땅굴 견학을 다녀오신 일이 있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땅굴 앞에서 찍었던 아버님의 사진을 지금도
기억할 수 있다. 아버님의 견학 때문인지 난 제3땅굴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기 그지 없었다.

어떻게 땅 속에 긴 터널을 만들었을까? 어떻게 들키지 않고 건설할
수 있었을까? 온갖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었었다.

 
여기로 가면 판문점이야

그런 제3 땅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나는 바쁜 일정을 뒤로한 채
발행인들이 탑승한 대형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가 탄 버스는 자유로를
따라 통일로 쪽으로 쭉쭉 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버스가 통일대교를 건너 자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여기로 쭉 가면 판문점이야.”

말로만 듣던 판문점을 떠올릴 때 버스는 “통일의 관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철재 막사와 군인 몇 명이 보초를 서고 있는 “통일의 관문”을
벗어나자 남북출입사무소가 보였다.

 
남북출입사무소와 도라산역

우리는 통일부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남북대화 설명회장으로 이동했다.
일행은 회의장에서 윤정원 대표(통일부 남북회담본부)가 전하는 남북관계
및 남한의 대북정책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30여분의 브리핑이 끝나고 일행은 남북출입사무소 견학에 나섰다. 
작은 규모의 남북출입사무소의 출입경 심사대를 통과해 보고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도라산역으로 이동했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도라산역은 북으로 가는 첫 번째 역이라고
한다. 도라산역에서 판문역, 손하역을 거치면 개성역에 도착한다.
지척에 북한 땅을 두고도 허가 없이는 건널 수 없다는 사실을 접하니
“분단의 비극”이 실감나게 느껴졌다.

손만 내밀면 손에 잡힐 듯 북한 땅을 앞에 두어서인지 도라산역을
둘러보는 발행인들은 쉽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북으로 향하는 철로에 마음을 싣어 보내고 일행은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단체사진을 찍었다. 잡지발행인들을 인솔해 견학에 참석한 노영현
회장(한국잡지협회)을 비롯해 전웅진 부회장, 허광수 전회장, 류종기
발행인, 장수근 소장(한국자유총연맹 연구소), 이문세, 김찬근, 서동해
발행인 등이 카메라 앞에 섰다.

나는 이날 세명의 여성 발행인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김성미, 이선자,
곽혜란 발행인이었다. 여성 발행인들과 함께 하는 도라산역 견학은
무척 편안하였다.

 
관광객 넘치는 제3땅굴

도라산역을 둘러본 후 우리는 바로 제3땅굴로 이동했다. 제3땅굴
견학지는 생각처럼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파주시에서 운영한다는 제3땅굴은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데
작년에만 401만7천명이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제3땅굴 도보 관람로 앞에 모이자 시청 관계자가 땅굴에 대한 설명과
주의사항을 알려준다.
 
제3땅굴은 1978년 발견되었는데 그 길이가 1,635m, 폭 2m, 높이 2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란다.

북한군 무장병력 3만명이 1시간 이면 통과할 수 있도록 설계된
땅굴이라 하니 북한의 남침야욕을 새삼 엿볼 수 있었다.
 
“북한은 이곳 외에도 여러 개의 땅굴을 더 파놓았다”는 관계자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우리보다 앞서 제3땅굴을 둘러보고 나오는 관광객을
살펴보았다. 효도관광을 온 것인지 고령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보였다.

그들 중에는 70세가 넘는 아주 고령의 할머니도 계셨는데 일행으로부터
뒤쳐질까봐 “헉헉” 거리시면서도 허둥지둥 뒤따라가시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저리 불편하신 몸으로 땅굴을 찾은 할머니는 혹시
가족을 북한에 두고 오신 이산가족은 아니실까? 반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분단의 아픔은 가시지 않은 채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 지고 있었다.


제3땅굴을 밟다

드디어 우리가 땅굴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나는 땅굴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 입구에 들어서면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드디어 땅굴이라는 곳에 들어섰구나 생각하니 모든 것이 신기해
보였다. 제3땅굴은 그 긴 통로 벽이 모두 바위덩어리로 되어 있었다.

북한군이 돌덩어리를 파내 이런 땅굴을 만들고 집념을 불태웠을 생각하니
그 어리석음에 입을 닫을 수 없었다.

땅굴 통로 주변은 돌을 깎아서 인지 울퉁불퉁해 머리를 다칠 위험성이
높아 보였다. 땅굴의 경사도 가파러 내려갈 때는 미끄러지듯이 내려가지만
올라올 때는 산을 타는 형국이 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려갈 때는 일행들과 제3땅굴의 비하인트 스토리(땅굴을
발견하게 된 것은 월남한 북한군이 위치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란다)를
들으며 즐겁게 내려왔으나 되돌아 올 때는 저절로 허리가 굽어지면서
“헉헉” 숨이 차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컴컴한 지하통로를 빠져 나오자
판문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감 넘치는 판문점

판문점에 다다르자 군인들이 눈에 띄었다. 군기(?) 잡혀 있으면서도
예의바른 젊은 군인들은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캠프 보니파스(Camp Bonifas)에서 판문점 방문교육을 하는 군인과
이동 버스 안에서 판문점을 안내하는 군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군인들이
그리 친숙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나는 이들 군인들을 보면서 내 아들을
떠올려봤다.

내 아들은 고3이다. 이제 곧 군대에 갈 때가 다가온다. 스스로도
군대는 일찍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아들이다. 총명한
군인들을 보며 내 아들도 이들처럼 군대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군기 반장 같은 안내병사

우리는 이날 판문점을 견학하면서 북한군의 사격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과 그런 일이 발생해도 군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판문점 견학이 생명을 담보로 할 만큼 위험한 관광인지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판문각에 이르자 어디를 가려고 하는지 안내병사의 긴장감 넘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동하면서 북한쪽을 향해 손짓을 하거나 제 허락 없이는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까?”
“네”

서약서까지 쓸 정도로 위협을 느끼는 상황인지라 일행은 안내 병사의
지시를 잘 따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평상시 몸에 밴 행동이 억제한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안내병사의 주의를 받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로 인한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군사분계선에 서다

판문각에서 분단 경계선을 둘러보고 들어간 곳은 바로 판문점이었다.
커다란 책상이 몇 개 놓여있고, 유엔군 깃발이 탁자위에 놓여 있었다.
몇 명의 헌병들이 꼼짝도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군사분계선이
이 건물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뒤는 남한이고, 앞은 북한입니다."


판문각에서 바라본 분단경계선

안내병사의 말에 “북한 땅 한번 밟아 볼까”하는 생각에 북한쪽으로
군사분계선을 살짝 넘었다. 그리고는 “와. 내가 북한 땅에 와있구나”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몇 초도 지나기 않아 바로 남쪽 땅으로 넘어왔다. 역시 남한 땅에
있을 때 내 마음은 편안해 진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북한이 두렵다. 금강산에서 얼마 전 한 관광객이
참변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웬만한 사람은 다 가보았다는 금강산을 여지껏
가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한번쯤 가 볼만한 금강산이지만 금강산관광이 시작된 지 6년이 지났어도
북한 땅에 발을 디딜 수가 없었던 것은 바로 북한체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법도 인권도 없어 보이는 북한에 억류될 수 있다는 불안감 말이다.


태극기와 인공기

판문점을 빠져나와 군용버스에 몸을 실으니 제5관측소로 일행을 안내했다.
제5관측소는 지대가 높아남한 대성동 마을의 태극기와 북한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를 볼 수 있었다.

북한의 기정동 인공기 게양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기 게양대라고 한다.
그 높이가 무려 1,060m에 이른다. 남한에 뒤질 세라 자존심을 세우려는 듯
게양대를 높였다는 설명이다.


차창 넘어로

아침 9시에 출발한 통일부 초청 판문점 견학은 오후 5시가 되자 막을
내렸다. 노영현 회장님은 발행인들을 위해 판문점 기념타월을 선물해
주었다.

30여년이 지나 처음으로 방문하는 제3땅굴과 판문점은 기념타월에
새겨진 “판문점기념”이란 글씨만큼이나 내 마음속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떠날 시간이 되자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분단의 현장을 뒤로하고 남북출입국사무소, 제3땅굴, 판문점 그리고
우리를 안내한 아들 같은 군인아저씨들을 떠올리며 남북통일을 염원해 본다.




     *제3땅굴

     1978년 10월 17일 판문점에서 4㎞, 군사분계선 남방 435m
     지점에서 땅굴수색 시추공사를 하던 중, 한 시추공에 박혀
     있던 PVC파이프가 튀어나오고 지하수가 공중으로 12m 가량
     솟아오르면서 발견되었다.

     제3땅굴은 임진강 하구에서 판문점을 향하여 남북으로 그어진
     군사분계선의 서쪽 1,200m 지점으로 추정되는 북한측 지역의
     입구로부터 전체길이 1,635m를, 지하평균 73m의 암석층을
     굴착하여 왔다.

     너비 2m, 높이 2m로 아치형 구조의 대규모 땅굴이다. 남쪽
     출구는 세 갈래로 나누어지고 전술능력으로 보면 시간당
     무장병력을 3만명이나 통과시킬 수 있다.




황은숙 박사